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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스크랩] 왕의 혈통

by 감문국 2010. 1. 23.

왕의 혈통

닐 기유메트

자녀가 되면 또한 상속자도 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을 받을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으니

영광도 그와 함께 받을 것이 아닙니까?아주 먼 옛날, 갈로니아라는 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에 아직 왕과 왕비, 그리고 빛나는 갑옷을 입은 멋진 기사들이 살고 있었던 때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실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란프랑이라는 젊은이는 그런 굉장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소문으로만 들어 알고 있었다. 그가 농촌 소년으로 자랐던 모리몬드라는 작은 마을에는 그런 인물들이 나온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골 소년들이라고 하여, 용감한 기사가 나타나 곤경에 처해 있는 고귀한 신분의 아가씨를 구한다든지, 왕의 충신들이 흉악한 남작을 쳐부순다는 등과 같은 놀이에 열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부스스 헝클어진 금발에다 체격이 좋은 란프랑은 그런 놀이를 할 때면 언제나 주인공 역할을 하였다. 란프랑은 본래 과묵하고 점잖았지만, 전쟁놀이를 할 때면 누구보다도 용감무쌍하게 행동했다. 그래서 굳이 인기를 독차지하려 나서는 것도 아닌데, 그의 놀이 친구들은 자연스레 그를 대장으로 생각하게 됐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즐거움도 잠시뿐이었다. 점차 청년이 되어 가면서 란프랑은 마을의 다른 청년들처럼 학교도 그만두고, 친구들과 무리지어 다니면서 장난치며 노는 것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농부로서 농사일을 해야 했다.

매년 란프랑의 생일에는 이웃 마을 로르세에 사는 클레시아 대모님이 찾아오곤 했다. 클레시아 대모는 50대 초반의 학교 선생이었다. 그녀는 지혜롭고 훌륭한 성품으로 인해 모든 주위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한때 위세당당한 귀족가문의 귀부인이었는데, 불운이 겹쳐 그런 외진 곳에 와 산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었다. 사실 아무도 그녀가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지 전혀 모른다. 다음과 같은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그녀가 금발머리 아이와 함께 로르세 마을에 나타났는데, 누가 보아도 그 아이는 그녀의 친아들이 아님이 분명하였다. 그녀의 머리는 서양 자두처럼 까만색이었으며, 이웃 모리몬드 마을에 사는 가난한 농부 루퍼트 씨에게 그 아이를 양자로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로르세 마을의 아이들을 가르치며 조용히 살아 왔다. 여행이라면 일 년에 한 번, 란프랑의 생일에 모리몬드 마을에 다녀오는 것이 전부였다.

올해는 란프랑이 매우 특별한 생일을 맞았다. 18세가 되어 법적으로 성년이 되는 해였기 때문이다. 정식으로 어른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갖게 되는 날이었다. 란프랑의 경우에는 사실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농부란 그리 별스러운 직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란프랑은 아버지의 힘든 일을 덜어 드릴 수 있다는 사실이 즐거웠다. 친부모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란프랑은 진심으로 부모님을 사랑했다.

클레시아 대모는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란프랑의 생일날 찾아왔다. 그런데 인사를 나눌 때에 보통 때와는 달리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동시에 마음 속은 기쁨으로 빛나고 있는 것 같았다. 방문 목적을 빨리 밝히고 싶어서 마음이 설레이는 듯, 그녀는 형식적 인사말은 생략하고 곧장 테이블 끝자리에 가 앉았다. 가족들은 모두 그녀가 정식 가족 회의를 열고 싶어한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짧은 축제 분위기도 사라지고, 온 가족이 테이블 주위로 모여 앉았다. 란프랑은 클레시아 대모의 오른편에, 루퍼트 씨는 그녀의 맞은편에, 그리고 나머지 식구들은 양쪽에 적당히 둘러앉았다. 잠깐 의미심장한 침묵이 흘렀다.

클레시아 대모는 애정이 담뿍 서린 눈빛으로 농부와 그의 아내를 바라보았다.

"루퍼트 씨, 그리고 길로나 부인, 란프랑이 성년이 되는 열여덟 번째 생일인 오늘, 슬픔과 기쁨을 동시에 경험하게 되는군요. 슬픈 일이란, 란프랑을 키우시면서 늘 마음의 각오를 하고 계셨겠지만, 처음부터 말씀드린 대로 저는 오늘 란프랑을 데리고 이곳을 떠날 거라는 사실입니다."

상상조차도 해본 적이 없는 엄청난 소식에 란프랑의 형제 자매들은 숨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했다. 금발의 란프랑도 얼굴빛이 창백해졌다. 그러나 아무 말 없이 침착하게 앉아 있었다. 란프랑은 두려움과 동시에, 분명치는 않지만 마음 속에 어떤 직감이 왔다. 마치 눈먼 장님이 빛이 있는 쪽으로 더듬거리며 나아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자신이 루퍼트 씨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의 신분을 귀띔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제 모든 것을 확실히 알고 싶은 열망이 더욱 간절해졌다.

클레시아 대모의 말은 계속되었다.

"오늘 란프랑이 여러분과 헤어지는 것은 슬픈 일이면서도 동시에 기쁘고 자랑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란프랑은 자신의 본래 모습인 고귀한 신분을 회복하러 가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을 집중하는 듯했다.

"십칠 년 전 제가 여러분께 아기인 란프랑을 한 가족처럼 키워 달라고 부탁드렸을 때에는 그의 신분을 밝힐 수가 없었습니다. 란프랑의 신분이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어떤 해를 당하게 될지 알 수 없었으니까요. 이젠 란프랑도 어른이 되었으니 어려움도 헤쳐 나갈 수 있겠고, 갈로니아 백성들의 유익과 행복을 위해 그의 진정한 상속권을 주장해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오른쪽에 당당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젊은이를 바라보았다. 이야기를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미소를 머금었다. 잘생기고 건장한 란프랑을 자랑스러워하는 눈빛이 역력하였다.

"사랑하는 대자, 란프랑!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한다. 이제 네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놀라운 사실을 이야기해 줘야 할 때가 왔구나…."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고, 표정이 다시 한 번 엄숙해졌다.

"…네가 성취해야 할 막중한 임무도 말해 줘야겠다."

란프랑은 마술에라도 걸린 듯 꼼짝 않고 듣고 있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어떤 확신 같은 것이 우러났다. 어릴 때부터 꿈꿔 오던 기사다운 행위, 위대한 업적 등 한시도 마음 속에서 떠나 본 적이 없던 열망을 이룰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네게는 물론, 너의 양부모님에게도 네가 정말 누구인지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지. 그것은 너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단다. 네가 어른이 되어 혼자서도 능히 처신할 수 있을 때까지는 너의 출생을 비밀로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젠 너도 성년이 되었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책임질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고 담대해졌으니 말을 해줘야겠구나."

그녀는 엄청난 비밀이라도 밝히려는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란프랑, 너는 왕실의 혈통으로 이 나라 국왕의 외아들이란다. 십칠 년 전 유모와 함께 감쪽같이 자취를 감춘 하나밖에 없는 왕자야. 그 당시 너의 아버지 스티븐 국왕은 끊임없이 괴롭히는 외적의 침략을 퇴치하기 위해 폐하의 조카인 힝마르 공(公)에게 잠시 왕국의 일을 맡기셨었어. 너의 어머니는 너를 낳고 며칠 후 돌아가셨는데, 숨을 거두기 직전, 내게 너의 유모이며 대모가 되어 달라고 부탁하셨지. 나는 그때 시녀이면서 네 어머니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그런 그후 몇 달 안 되어 흉악한 힝마르 공이 왕위를 탐내고 너를 죽이려 들었어. 과거에 흔히 그랬듯, 전쟁터에 나간 국왕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왕의 유일한 혈육인 왕자만 없애면 능히 왕권을 잡을 수 있다는 흑심을 품었던 거지. 이런 사실을 국왕 폐하께는 알릴 수가 없었단다.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쟁 중이셨으니….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은 너를 업고 도망치는 거였지. 궁궐 밖으로 빠져 나와 달릴 수 있는 데까지 달렸어. 결국 로르세 마을을 은신처로 삼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우리 두 사람의 정체를 숨기고 살아온 거야. 금발의 남자아이와 여자 단둘이만 살면, 혹시라도 힝마르 공의 밀정이 알아볼까 봐 어쩔 수 없이 너를 나와 멀리 떨어진 이 모리몬드 마을에 양자로 보내게 되었던 거야. 너는 왕의 핏줄을 이어받은 란프랑 왕자란다."

란프랑은 할 말을 잃었다. 너무 엄청난 이야기라서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렇지만 클레시아 대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지금까지 가슴 속에만 품어 온 소망이 확실해지는 것을 통감했다. 사실 마음 깊은 곳에선 언제나 "너의 아버지께로 돌아가라."라고 속삭이는 음성이 있었다. 익히 아는 사이였지만 오늘따라 낯설게만 느껴지는 이 여인은 지금 란프랑이 머릿속으로만 꿈꾸어 오던 것을 구체적인 현실로 바꾸어 놓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 말을 그대로 믿기엔 너무 이상한 것 같지 않은가? 반쯤은 정신이 나간 사람 같기도 하다. 모두 그녀의 뒤틀린 심사가 꾸며 낸 거짓말이 아닐까?

그러나 마치 란프랑의 마음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이 클레시아 대모는 덧붙여 말했다.

"왕자가 내 말을 못 믿을 수도 있으니 세 가지 증거를 대지. 언젠가는 갈로니아 백성 모두가 듣게 될 거야. 첫째는 죽지 않고 살아 있는 바로 나 자신이야. 내가 궁궐에 나타나면 모두가 예전의 시녀 클레시아를 알아볼 거야. 내 얼굴은 십칠 년이 흘렀어도 거의 변하지 않았으니까. 둘째는 왕자의 가슴, 심장 바로 윗부분 살갗에 새겨져 있는 하얀 십자가 표시야. 왕실의 귀족과 귀부인들은 모두 알고 있지. 왕족의 피를 받고 태어난 모든 직계 남자아이에겐 대대로 그 표를 새긴다는 것을 말야. 힝마르 공은 방계 자손이므로 그 표가 없어. 셋째는 가장 분명한 증거가 될 거야."

클레시아 대모는 회상에 잠긴 채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계속 이야기했다.

"왕자가 아버지 국왕 폐하 옆에 나란히 서면 갈로니아 백성 모두가 보게 될 거야. 왕자가 국왕의 모습을 빼다 박은 듯 닮았다는 것을…."

이 모든 설명을 다 듣고 난 란프랑은 클레시아 대모의 이야기를 반신반의하면서도 믿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클레시아의 이야기대로라면, 가슴에 왕의 핏줄임을 나타내는 십자가 표가 있지 않은가?(어린 시절 개울에서 헤엄치며 놀 때,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곤 했었다.) 또, 지금 함께 살고 있는 가족 중 누구와도 전혀 닮지 않았다. 이웃 사람들과도 물론 닮은 구석이 없었다. 또한, 국왕과 궁정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면, 남몰래 가슴이 두근거리곤 하지 않았던가? 모든 게 결정적인 근거라고 볼 수는 없지만 뭔가 짚이는 것이 있었다. 게다가 대모의 인품은 얼마나 믿음직한가! 너무나도 진실되고 굳세며 고매하고 성실하기 이를 데 없다. 그녀의 이야기가 환상이나 망상일 리가 없다는 확신이 섰다. 참으로 고결한 이 여인이 거짓말을 꾸며 댈 리가 없었다. 참나무에 산버찌가 열릴 리 없듯이 말이다. 잠시 이러한 생각에 잠겨 있던 란프랑은 마침내 대모를 향해 안심하라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전 대모님을 믿습니다, 믿고말고요."

왕자의 말을 들은 대모 클레시아는 마음이 놓였다. 왕자가 그녀를 신뢰하고 있고, 영광스러운 운명을 향해 용기 있게 첫발자국을 내딛는 것을 보니 무척 안심이 되는 모양이었다.

란프랑이 물었다.

"이제 제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이젠 네 신분을 알았으니, 앞으로의 임무를 잘해 내기 위한 준비를 해야지."

"어떻게요?"

"사악한 힝마르 공의 야심을 단호히 꺾어 버리기 위해서는, 국왕 폐하께서 네가 당신의 외아들이란 걸 인정하시도록 해야 한다."

그 다음에 이어진 그녀의 설명은 이러했다.

오래 끌었던 전쟁에서 승리한 스티븐 왕은 마침내 왕국에 평화를 회복하고 궁정으로 되돌아와, 왕위에 오르려는 힝마르 공의 야망을 초기에 좌절시켰다. 왕비는 죽고 왕자마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사실을 알고는 매우 상심하였지만, 마음을 다져 먹고 나라 일을 빈틈없이 해나갔다. 여러 해 동안 사악한 힝마르 공은 몇 번씩이나 국왕 암살음모를 꾀했지만 그의 흉계는 늘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의 계략은 너무도 간교해서, 국왕은 그의 반역행위를 폭로하고 추방시킬 만한 증거를 잡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힝마르 공은 늘 국왕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염탐하며 헛되이 왕의 자리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거였다.

란프랑은 당면한 임무가 막중함을 느꼈다. 외딴 벽촌에 살며,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한 촌뜨기에 불과한 자신이 어떻게 권모술수에 능하고 교묘한 힝마르를 당해 낼 수 있단 말인가? 그를 제압할 수 있는 자신감과 용기, 당당함을 어떻게 갖출 수 있을까?

이번에도 클레시아 대모는 그의 생각을 꿰뚫어본 듯 말했다.

"미리 걱정하지 말아라. 이 모험이 불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도 버려라. 언제나 내 말을 믿어라. 그러면 힝마르 공의 야망을 꺾을 수 있을 거야. 나와 함께 가서, 내 충고를 따른다면 국왕이신 너의 친아버지를 부둥켜안고 기뻐하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이리하여 란프랑 왕자의 모험은 시작되었다. 그 동안 함께 살았던 가족들과 쓰라린 이별을 고하고, 대모와 함께 길을 떠났다.

란프랑은 곧장 궁으로 들어갈 줄 알았는데 대모의 계획은 따로 있었다.

"먼저 굳세고 경험 많은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하오. 가능한 한 다방면으로 체험을 해보고, 이 나라와 이 나라 백성의 실태를 손바닥 보듯 환히 알아야 하오. 또한 왕자님을 포함하여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복잡한지도 깨달아야만 이 나라 국왕의 아들 자격이 갖추어지는 것이오."

그리하여 그녀의 계획은 하나하나 실행되어 나갔다. 7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둘이서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나라 사정을 살폈고, 경험을 쌓았고, 때론 명상에도 잠기며 배워 나갔다. 그렇지만 이것은 그저 단순히 이론적 훈련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어디를 가든 클레시아 대모는 젊은 왕자에게, 가난한 이들 편에서 억압받는 이들의 권리를 옹호해 주고, 잘못을 바로잡고, 약자들을 도와 주며, 애통해하는 이들과 함께 슬퍼하고,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도록 가르쳐 주었다. 이 모두가 저절로 습득되는 것이 아니었다. 언제나 클레시아 대모가 힘과 영감을 주었다. 그녀는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그 상황에 대한 부당성을 적절히 지적해 주곤 했으며, 그 부당함을 시정하기 위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해 주었다. 한편으로는, 압제자들이 왕자의 생명을 노릴 때면 맞서 싸우도록 용기를 북돋워 주었고, 죄악에 대항하다 지치면 새로운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7년간 란프랑은 많은 일을 겪었다. 한 번은 폭력단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기까지 했으며, 여러 번 감옥에 갇히기도 했고, 칼에 두 번 찔린 적도 있으며, 수없이 강도를 당했고, 그 밖에도 여러 가지로 온갖 곤란을 다 당했다. 그러니 왕자가 낙담하는 것은 당연했다. 왕자는 다른 사람들을 도와 주는 일, 더 나아가서는 국왕이신 아버지를 찾아뵙고 자신이 살아 있음을 알리는 일까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다는 유혹이 들곤 했다. 그럴 때마다 언제나 클레시아 대모가 중심을 잃지 않도록 일깨워 주었다.

"왕자님, 용기를 잃지 마시오. 스티븐 국왕 폐하께서 왕자야말로 과연 내 아들답다고 생각하실 날이 반드시 올 것이오."

그러나 그의 방랑생활을 정말로 어렵게 하는 것은 위와 같은 시련이 아니었다. 오히려 평화로운 마을에 당도하여 따뜻한 대접을 받으며 정의와 친절이 흘러 넘치는 것을 볼 때, 잘생긴 그에게 눈길을 보내는 어여쁜 아가씨들이 눈에 띌 때야말로 모든 것을 뒤로한 채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그런 즐거운 한때는 그의 마음을 해이해지게 했고, 다음 목적지를 향해 나아갈 추진력을 빼앗았다. 왕자는 그러한 평화의 안식처에서 영원토록 머물며 결혼도 하고 조용한 삶을 펼쳐 보고 싶은 생각이 들곤 했다. 한편 그런 상념에 빠질 때마다 클레시아 대모는 잊지 않고 왕자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왕자는 아버지 국왕 폐하께 가셔야 하오. 그곳이야말로 왕자의 진정한 집이 될 것이오."

한 번은 견디기 힘든 유혹이 들어 대모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클레시아 대모님, 진정한 집이라는 게 뭐죠?"

"진정한 집이란 그대 마음이 편안히 쉴 수 있는 곳이오."

이 말은 왕자가 아버지의 품에 안길 때까지 잊혀지지 않았다. 란프랑 왕자는 잠시 그렇게 유쾌하게 기분전환을 하고 나면, 다행히도 얼마 안 가서 휴식을 제공했던 그곳이 더 이상 그의 들뜬 마음을 잠재우지 못한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게 되었다. 아버지 품에 안기고 싶다는 갈망이 더했기 때문이었다. 발걸음이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이별의 비통함을 참으면서 결국 대모님과 함께 앞으로 나아갔다.

마침내 란프랑 왕자는 모든 준비를 마쳤고, 마지막 관문인 사악한 힝마르 공을 대면해야 할 날이 드디어 왔다. 한평생이 다 가는 것 같았던 7년간의 엄격한 훈련을 통해, 순진한 시골뜨기 소년이 이제 어엿한 청년으로 바뀐 것이다. 금발이 유난히 돋보이는 왕자는 키도 훤칠했고 젊은 신처럼 숭앙받는 고귀한 젊은이가 되었다. 클레시아 대모는 이렇게도 훌륭히 자란 고매한 왕자가 곁에 있다는 것이 정말 감격스러웠다. 그들은 궁정에 거의 다다르고 있었다.

성읍에 이르러 보니 사람들이 온통 축제 분위기로 들떠 있었다. 마침 갈로니아 나라의 수호성인 성이시도르의 축일이었던 것이다. 이날엔 국왕이 근사한 향연을 베풀고, 성읍에 사는 모든 귀족과 귀부인들을 초대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클레시아 대모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녀는 예전의 친구들에게 찾아가(물론 그렇게 오랜만에 나타난 클레시아를 보고 그들은 너무 놀라서 말도 못할 정도였다.) 왕자와 그녀 자신에게 어울리는 멋진 옷을 얻어 입었다. 축제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그녀는 왕자를 데리고 국왕 앞으로 나아갔다.

란프랑이 나타나자 일순간 대단한 소요가 일었다. 모두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로 쏠렸다. 저렇게도 당당하고 늠름한 청년은 누구인가? 그 옆에 서 있는 품위있는 여인은 또 누구인가? 홀 중앙의 높은 단에 앉아 있던 국왕도 사람들의 동요를 느꼈다. 란프랑에게 시선이 멈춘 왕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제할 수 없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물밀듯이 기쁨이 솟구쳤다. 키가 훤칠한 그 청년은 자신이 젊었을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왕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생각했다.

'바로 내 아들 란프랑이로구나.'

드디어 란프랑은 왕이 앉아 있는 높은 단 앞까지 다가갔다. 클레시아 대모가 먼저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나아가 깊이 고개 숙여 절하고 나서,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국왕 폐하, 저를 알아보시겠지요. 전하의 외아들 란프랑의 유모이자 대모로 수년 전 이 궁궐에 살았던 클레시아입니다."

물론 왕은 즉시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그녀는 그토록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모습이 거의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요, 알고말고요, 클레시아. 그런데 이 젊은이는 누군가요?"

국왕은 마음 속으로 이미 믿고 있는 것을 확인하려는 듯 다급히 물었다.

"국왕 폐하, 그 옛날 자취를 감추었던 전하의 외아들 란프랑 왕자이십니다."

동시에 젊은이는 왕의 눈을 마주보며 조용히 말했다.

"그렇습니다. 제가 바로 란프랑입니다."

그러고 나서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가슴을 드러내 보였다. 심장 바로 윗부분에 왕실의 혈통임을 나타내는 하얀 십자가 표시가 있었다. 왕은 더 이상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사랑하는 내 아들! 이리로 오너라! 아버지 품에 안겨라!"

왕과 왕자는 서로 부둥켜안았다. 그 환희 속에서 란프랑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예전에 클레시아 대모가 했던 말이었다.

'진정한 집이란 네 마음이 편안히 쉴 수 있는 곳이다.'

이제 왕자는 그의 진정한 집에 당도했음을 느꼈다.

그 가공할 힝마르 공은 어떠했던가? 그는 왕좌의 오른편에 선 채로 망연히 그 모든 장면을 다 지켜보고 있었다. 들고 일어나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결투를 신청했을까? 전혀 아니었다. 왕자와 힝마르는 직접 대변할 기회도, 그럴 필요도 없었다. 거만하게 있는 허세, 없는 허세를 다 부렸지만 힝마르는 본래 천하에 둘도 없는 겁쟁이였기 때문이다. 젊은 왕자의 탁월한 인품에 맞닥뜨리자 그는 자신의 뒤틀린 심사가 얼마나 보잘것 없는 것인지 느꼈던 것이다. 그가 취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방법은 그날 밤 당장 궁궐을 떠나는 것뿐이었다. 그후 그에 대해서는 아무런 소식도 들을 수가 없었다.

스티븐 왕과 란프랑 왕자는 오래도록 축복받은 삶을 살면서, 갈로니아 백성들이 모두 행복하게 잘 살도록 열심으로 돌보았다. 그리고 왕과 왕자가 둘이서 함께 노력한 결과, 갈로니아 왕국은 모든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쉴 수 있게 해주는 진정한 집이 되었다.

출처 : 수레꽃
글쓴이 : 수레꽃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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